분류 전체보기72 조선 왕실 무덤 도굴 시도?! '오페르트 도굴 사건'의 전말 조선 왕실 무덤 도굴 시도?! '오페르트 도굴 사건'의 전말1. 오페르트 도굴 사건이란?1868년(고종 5년), 독일 상인이자 상하이 거주 무역상인 에른스트 오페르트(Ernst Oppert) 가 조선의 남연군(흥선대원군의 아버지) 묘를 도굴하려 했던 충격적인 사건입니다.조선 정부는 쇄국 정책을 유지하며 외세의 접근을 철저히 차단하고 있었고, 이에 대한 서양 열강의 반발이 커져가던 시기였습니다. 오페르트는 통상을 요구하며, 대원군의 약점을 노리기 위해 그의 부친 묘소를 직접 파헤치는 전례 없는 무례를 저질렀습니다.이 사건은 조선이 외세와 본격적인 충돌로 이어지는 도화선이 되었고, 한국 근대사에서 외세의 무력 시도가 정치적·문화적 충격으로 이어진 대표적 사건으로 기록됩니다.2. 사건의 배경 – 통상 요구와 .. 2025. 7. 31. 일본에 맞서 독도 지킨 조선의 민간인 외교관 – ‘안용복 도해 사건’ 일본에 맞서 독도 지킨 조선의 민간인 외교관 – ‘안용복 도해 사건’1. 안용복, 그는 누구인가?안용복, 독도 도해 사건, 조선 민간 외교관안용복은 조선 숙종 대(17세기 말~18세기 초)에 활동한 평민 신분의 어부였습니다. 그런데 단순한 어부가 아니었습니다. 그는 일본의 독도 영유권 주장에 직접 맞서 싸운 최초의 조선인 민간 외교관으로 평가받는 인물입니다. 그의 행적은 1693년과 1696년, 두 차례 일본으로 건너간 ‘도해 사건’을 통해 기록되어 있습니다.당시 울릉도와 독도는 조선의 고유 영토였지만, 일본 어선의 불법 조업이 잦았고, 일본 측은 은근히 ‘자국 영토’라는 주장을 펼치기 시작했습니다. 이에 어부였던 안용복은 울릉도 근해에서 일본 어민과의 갈등을 계기로 일본으로 건너가 조선의 입장을 주장하.. 2025. 7. 30. 조선과 미국의 첫 충돌? – ‘제너럴 셔먼호 사건’의 진실 조선과 미국의 첫 충돌? – ‘제너럴 셔먼호 사건’의 진실1. 제너럴 셔먼호 사건이란?제너럴 셔먼호 사건은 1866년 조선 고종 3년, 평양 대동강에서 발생한 조선과 미국의 첫 무력 충돌 사건입니다.미국 상선 제너럴 셔먼호(General Sherman)는 통상 개방을 목적으로 조선에 무단으로 접근하다가, 평양 관민의 저항으로 침몰하고 선원 전원이 사망한 사건입니다.당시 조선은 쇄국 정책을 고수하고 있었으며, 외국과의 무역이나 통상을 엄격히 통제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서양 열강의 잦은 통상 요구가 이어지던 가운데, 제너럴 셔먼호는 사전 협의 없이 대동강을 거슬러 올라오며 충돌을 일으킨 것입니다. 2. 사건의 배경 – 쇄국 정책과 서구 세력의 팽창조선 후기에 접어들며 서양 열강의 동아시아 진출이 본격화됩니.. 2025. 7. 30. 고려 흥화진 전투: 잘 알려지지 않은 전환점, 양규 장군의 숨은 승전 고려 흥화진 전투: 잘 알려지지 않은 전환점, 양규 장군의 숨은 승전1. 흥화진 전투란? 고려 현종 1년(1010), 거란(요나라)이 40만 대군을 이끌고 한반도로 침입해오면서 벌어진 전투입니다.특히 흥화진은 압록강을 넘어 조선을 향한 거란군이 반드시 지나야 할 전략적 요충지였습니다.이에 거란은 흥화진 포위를 시도했으나, 순검사 양규(楊規) 장군은 단호하고 끈질긴 방어로 이를 저지했습니다.이 전투는 조선·고려 외교와 방어 정책의 중요한 갈림길이었으며, 이후 강감찬의 귀주대첩으로 이어지는 흐름의 시발점이었습니다.2. 흥화진 배경 – 고구려 계승과 강동6주 확보의 의미고려 성종 14년(995), 강동 6주를 확보한 이후 축조된 흥화진은 고려의 북방 방어 체계의 핵심이었습니다.원래는 서희의 외교 담판 덕분에 .. 2025. 7. 30. 조선 조정이 명·청 사이에서 흔들렸다 – ‘모문룡 주둔 사건’이란? 조선 조정이 명·청 사이에서 흔들렸다 – ‘모문룡 주둔 사건’이란?1. ‘정묘호란’은 이미 예고되었다?많은 사람들이 병자호란(1636)과 정묘호란(1627)을 “갑작스러운 청나라 침입”으로 기억합니다. 하지만 사실 정묘호란은 단순한 군사 도발이 아니라 조선 조정의 명나라 편향적 외교 정책이 낳은 결과였습니다. 이 과정에서 벌어진 가장 중요한 사건 중 하나가 바로 **‘모문룡(毛文龍) 주둔 사건’**입니다.이 사건은 중국 역사에선 거의 주목되지 않지만, 조선과 청나라 간 외교 갈등의 직접적인 도화선이 된 중요한 사건으로 평가됩니다.2. 배경 – 명나라의 후금 견제 전략17세기 초, 중국 대륙에서는 후금(훗날 청나라)이 만주 일대를 장악하며 세력을 키워가고 있었습니다. 이에 명나라는 후금의 성장을 막기 위해.. 2025. 7. 29. 정조의 숨은 개혁 – ‘초계문신제’, 젊은 엘리트를 키우다 정조의 숨은 개혁 – ‘초계문신제’, 젊은 엘리트를 키우다1. 초계문신제란 무엇인가?초계문신제(抄啓文臣制)는 조선 제22대 임금 **정조(재위 1776~1800)**가 직접 시행한 정치 엘리트 양성 프로그램입니다. 말 그대로 “초계(抄啓, 국왕의 곁에서 문신을 가르침)”라는 뜻처럼, 왕이 신하를 직접 교육하고 재교육하며 국정을 논의하는 제도였습니다.이 제도는 단순한 학문 토론이 아닌, 정조가 직접 젊은 관료를 선발하여 국정 운영의 파트너로 삼기 위한 목적을 담고 있었습니다. 오늘날로 치면 국가가 주도하는 고위 정책 인재 양성 시스템이라고 볼 수 있죠.2. 제도의 배경 – 탕평정치와 왕권 강화정조는 아버지 사도세자의 비극적인 죽음을 목격하며 성장했습니다. 영조 말기 붕당정치의 폐단, 노론의 독점적 세력에 .. 2025. 7. 29. 조선 후기, 또 다른 민중의 외침 – ‘장길산의 난’을 아시나요? 조선 후기, 또 다른 민중의 외침 – ‘장길산의 난’을 아시나요?1. ‘장길산’은 허구의 인물이 아니다많은 사람들이 장길산이라는 이름을 들으면 드라마나 소설 속 의적(義賊) 캐릭터를 떠올립니다. 실제로 홍길동, 임꺽정과 함께 ‘조선 3대 의적’으로 불리며 픽션에서 자주 등장했기 때문입니다.하지만 장길산은 실존 인물이며, 실제로 대규모 반란을 주도했던 인물입니다. 장길산은 조선후기 서얼, 승려 세력과 함께 봉기하여 거사를 도모하려 한 주모자로 조선 숙종 대(17세기 후반)에 활동한 그는 북한 지역을 중심으로 수천 명의 농민·유민을 규합하여 봉기를 일으켰습니다. 단순한 도적이나 산적이 아닌, 사회 부조리에 저항한 민중 운동의 지도자였던 것이죠.2. 배경 – 전쟁과 수탈, 그리고 유민장길산의 난은 1670년대.. 2025. 7. 29. 조선과 일본의 민감한 타협 – 잘 알려지지 않은 ‘계해약조(1443)’와 그 이면의 갈등 조선과 일본의 민감한 타협 – 잘 알려지지 않은 ‘계해약조(1443)’와 그 이면의 갈등1. 계해약조란? 조선과 일본이 맺은 불균형 조약의 시작1443년(세종 25년), 조선과 일본(특히 대마도주 사이) 간의 무역 조약이 체결됩니다. 이 조약이 바로 **‘계해약조(癸亥約條)’**입니다.당시 조선은 일본 해적(왜구)의 잦은 침입으로 해안 지역의 피해가 극심했고, 이에 세종은 정식 통상 창구를 통해 무역을 관리하며 왜구를 통제하겠다는 실용 외교 전략을 택합니다.대마도주는 조선의 속국 개념으로, 정기적으로 조공을 바치며 조선과 무역 가능조선은 일본 선박의 입항 수를 연간 50척으로 제한하고, 부산포를 공식 무역항으로 지정대마도주는 왜구를 통제할 책임을 약속이는 표면적으로는 상호 평등한 조약처럼 보였지만, 실제.. 2025. 7. 29. 명나라에 충성하던 조선, 후금에 군사를 보낸 이유 명나라에 충성하던 조선, 후금에 군사를 보낸 이유?– 강홍립 부대 파병 사건과 조선의 외교적 딜레마 1. 사건의 시작 – 명나라의 지원 요청17세기 초 조선은 두 강국 사이에서 줄타기를 하고 있었습니다.하나는 오래도록 사대하던 명나라, 다른 하나는 새롭게 급부상한 **후금(훗날 청나라)**입니다.1619년, 후금과 명나라가 만주의 **사르후(薩爾滸)**에서 대규모 전쟁을 벌이게 되었습니다.이에 명나라는 오랜 사대 관계였던 조선에 병력 지원을 요청합니다.조선은 이를 거절하기 어려웠고, 선조의 뒤를 이은 광해군은 1만 3천 명 규모의 조선군을 강홍립 장군의 지휘 아래 명군에 파병하기로 결정합니다.2. 광해군의 전략 – 진짜 목적은 따로 있었다?하지만 광해군은 무작정 명나라 편만 들 수 없는 상황이었습니다.후.. 2025. 7. 28. 이전 1 ··· 3 4 5 6 7 8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