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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미양요 – 1871년 미국의 강화도 침략과 조선의 항전

by 캐시올로지 2025. 8. 10.

신미양요 – 1871년 미국의 강화도 침략과 조선의 항전

1. 신미양요란?

신미양요(辛未洋擾)는 1871년 조선 고종 8년, 미국이 강화도를 침략한 사건입니다.
‘신미’는 사건이 일어난 해의 간지(辛未)를, ‘양요’는 서양 세력의 무력 침략을 뜻합니다.
조선은 척화비를 세우며 서양과의 무역과 외교를 거부하고 있었는데, 미국이 무력 시위를 벌이며 통상 개방을 요구하다 전투가 벌어졌습니다.

1871년 광성보 전투에서 어재연 장군이 결사 항전


2. 발생 배경 – 제너럴 셔먼호 사건과 미국의 통상 요구

신미양요의 직접적인 배경은 1866년 제너럴 셔먼호 사건입니다.
당시 평양에 무단으로 진입한 미국 상선 제너럴 셔먼호가 무역을 강요하다 충돌이 발생했고, 평양 군민과 관군이 배를 불태우고 승선 인원을 사살했습니다.
미국은 이를 빌미로 조선에 사과와 배상, 통상 개방을 요구했습니다.

또한 1866년 프랑스 함대가 병인박해를 구실로 강화도를 침략한 병인양요 이후, 조선은 척화비를 세우며 더욱 강경한 쇄국 정책을 이어갔습니다.
이로 인해 미국과의 갈등은 피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3. 미국의 강화도 침공

1871년 5월, 미국은 아시아 함대 사령관 로저스 제독이 이끄는 5척의 군함과 1,230명의 병력을 강화도에 파견했습니다.
표면적으로는 제너럴 셔먼호 사건에 대한 해명과 통상을 요구한다는 명분을 내세웠지만, 실질적으로는 무력 시위로 조선을 개방시키려는 의도였습니다.


4. 전투의 전개

(1) 초지진·덕진진 전투

미국 함대가 강화해협을 거슬러 올라가자 조선군은 해안 포대에서 포격을 가했습니다.
미국군은 초지진과 덕진진을 공격해 함락시키고 포대를 불태웠습니다.

(2) 광성보 전투

6월 11일, 미국군은 강화도의 핵심 방어 거점인 광성보를 대대적으로 공격했습니다.
조선군 수비대장 어재연 장군은 ‘결사대기(決死待期)’ 깃발을 걸고 끝까지 항전했습니다.
조선군은 화승총과 대포로 맞섰지만, 최신 무기와 화력을 갖춘 미국군에게 밀려 결국 광성보가 함락되었습니다.
이 전투에서 어재연 장군과 약 350명의 조선군이 전사했습니다.


5. 전쟁의 결과

미국군은 광성보를 점령했지만, 조선 정부가 사과와 통상 개방 요구를 끝까지 거부하자 목적을 달성하지 못하고 철수했습니다.

  • 조선의 입장 : 외세 침략에 맞서 끝까지 굴복하지 않았다는 자부심 고취
  • 미국의 입장 : 군사적으로 승리했으나 정치·외교적 성과는 전무

이 사건은 조선이 외세의 무력 압박에도 불구하고 쇄국 정책을 지속하게 만든 계기가 되었습니다.


6. 척화비와 쇄국 정책 강화

신미양요 이후, 조선은 전국 각지에 **척화비(斥和碑)**를 세웠습니다.
비문에는

“서양 오랑캐가 침범하면 싸우지 않으면 화친한다는 것을 경계하라”
라는 내용이 새겨져 있었습니다.

이 척화비는 조선의 쇄국 의지를 상징하는 유물로, 이후 1876년 강화도 조약 체결 전까지 서양과의 교류를 강력히 거부하는 정책 근거가 되었습니다.


7. 신미양요의 역사적 의의

  • 군사적 측면 : 화승총·대포 등 전통 무기와 최신식 무기의 격차가 드러남
  • 정치적 측면 : 조선이 외교적으로 고립되는 결과 초래
  • 외교사적 측면 : 조선의 쇄국 정책이 국제 정세 변화에 뒤처지게 됨

현대 역사학에서는 신미양요를 조선이 근대화를 준비할 시간을 놓친 계기 중 하나로 보기도 합니다.


8. 수능·내신 포인트

연도 1871년
원인 제너럴 셔먼호 사건, 미국의 통상 요구
주요 전투 초지진·덕진진 전투, 광성보 전투
인물 어재연 장군, 로저스 제독
결과 미국 철수, 조선 쇄국 정책 강화
상징물 척화비

9. 키워드

신미양요, 1871년 미국의 강화도 침략, 광성보 전투, 어재연, 척화비, 조선 미국 전쟁, 쇄국 정책, 제너럴 셔먼호 사건


마무리

신미양요는 조선이 서양 열강의 무력 압박에도 불구하고 통상 개방을 거부한 사건입니다.
비록 군사적으로는 패배했지만, 조선의 강경한 쇄국 의지를 국내외에 과시했습니다.
그러나 이 선택은 단기적으로는 주권을 지키는 효과가 있었지만, 장기적으로는 근대화와 국제 질서 편입이 늦어지는 결과를 낳았습니다.
오늘날 신미양요를 배우는 것은 국방력과 외교 전략이 국가 생존에 얼마나 중요한지를 다시금 생각하게 만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