을미사변과 아관파천 – 조선 외교의 대전환점
1. 을미사변이란?
을미사변(乙未事變)은 1895년 10월 8일, 일본 공사 미우라 고로가 주도한 일본군과 낭인들이 경복궁에 침입해 명성황후(민비)를 시해한 사건입니다.
일본은 조선에서의 지배권을 확립하고 러시아 세력을 차단하기 위해, 러시아와 외교적으로 가까워지던 명성황후를 제거하고자 했습니다.
이 사건은 조선 사회 전반에 큰 충격을 주었으며, 국제적으로도 일본의 침략적 본성을 드러낸 대표 사례로 기록됩니다.
2. 발생 배경 – 삼국간섭과 일본의 위기
1894년 청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시모노세키 조약을 통해 랴오둥 반도를 차지했지만, 러시아·프랑스·독일의 삼국간섭으로 이를 반환해야 했습니다.
일본 내부에서는 러시아에 대한 적개심이 폭발했고, 조선에서 러시아의 영향력을 견제하려는 움직임이 본격화되었습니다.
명성황후는 일본의 침략 의도를 경계하며 러시아와의 관계를 강화했습니다.
이러한 외교 노선은 일본에게 ‘가장 큰 걸림돌’로 인식되었고, 결국 명성황후 제거라는 극단적인 방법이 선택되었습니다.
3. 사건의 전개
1895년 10월 8일 새벽, 일본군과 낭인 50여 명이 경복궁을 급습했습니다.
이들은 궁녀와 관리들을 잔혹하게 살해하며 명성황후를 수색했고, 발견된 황후를 시해한 뒤 시신을 훼손하고 불태웠습니다.
당시 조선군은 제대로 저항하지 못했고, 사건은 몇 시간 만에 종료되었습니다.
4. 을미사변의 결과
- 국내 반발 : 전국에서 반일 감정이 폭발, 의병 봉기가 확산
- 국제 여론 악화 : 일본의 폭거가 서구 언론에 보도되어 비난 고조
- 정치 변화 : 친일 내각이 붕괴하고 친러 세력이 부상
또한 일본은 사건 직후 을미개혁을 강행하며 단발령을 시행했는데, 이는 전통을 중시하던 백성들의 반발을 불러와 의병 활동이 격화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5. 아관파천이란?
아관파천(俄館播遷)은 1896년 2월 11일, 명성황후 시해 사건 이후 신변의 위협을 느낀 고종이 러시아 공사관으로 피신한 사건입니다.
‘아관’은 러시아 공사관을 뜻하며, ‘파천’은 군주가 궁궐을 떠나 다른 곳으로 거처를 옮기는 것을 의미합니다.
6. 아관파천의 경과
고종과 세자는 새벽에 경복궁을 빠져나와 러시아 공사관으로 이동했습니다.
이후 약 1년간 조선의 정치 중심은 러시아 공사관으로 옮겨졌고, 조선 내 러시아의 영향력이 급속히 커졌습니다.
- 정치 변화 : 친러 내각 성립, 친일 세력 약화
- 외교 변화 : 러시아가 광산 채굴권·철도 부설권 등 주요 이권 장악
- 개혁 중단 : 을미개혁이 중단되고 개혁 추진 동력이 상실
7. 국제 정세 속 조선
아관파천은 일본의 영향에서 벗어나려는 시도였지만, 결과적으로 조선은 러시아의 영향권에 편입되었습니다.
러시아뿐 아니라 미국·영국·프랑스 등 열강이 조선에서의 이권 확보 경쟁에 뛰어들었고, 조선의 외교는 더욱 복잡하고 불안정해졌습니다.
1897년, 고종은 경운궁(덕수궁)으로 환궁하여 대한제국을 선포하고 황제에 즉위했습니다.
이는 자주 독립 의지를 천명한 선언이었으나, 실질적인 외세 의존 구조는 여전히 극복되지 못했습니다.
8. 역사적 평가
- 을미사변 : 일본 제국주의 침략의 본격화, 조선 주권 침해의 상징
- 아관파천 : 외세를 활용해 자주성을 지키려 했으나, 또 다른 외세 의존 초래
두 사건은 조선 말기 외교의 불안정성과 외세의 침략적 속성을 단적으로 보여줍니다.
특히 명성황후 시해는 조선의 외교 노선 변화뿐 아니라 국제 관계 속에서의 고립을 심화시켰습니다.
9. 수능·내신 포인트
연도 | 을미사변(1895년), 아관파천(1896년) |
원인 | 일본의 지배권 강화 시도, 러시아 영향 확대 |
결과 | 반일 감정 폭발, 친러 내각 성립, 열강 간섭 심화 |
관련 인물 | 명성황후, 고종, 미우라 고로 |
마무리
을미사변과 아관파천은 조선이 일본의 침략과 러시아의 간섭 속에서 국가 주권을 지키려다 실패한 사건들입니다.
두 사건은 조선 말기 외교의 한계와 열강 각축 속의 외교적 고립을 여실히 보여줍니다.
결국 대한제국 선포로 이어졌지만, 자주 외교를 지탱할 국력과 내정 개혁 기반이 부족해 멸망을 막기에는 역부족이었습니다.
오늘날 이 사건을 되새기는 것은 외교 전략에서 균형과 자주성을 지키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알려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