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훈구와 사림의 대립과 사화 – 조선 정치사의 피비린내 나는 권력 투쟁

by 캐시올로지 2025. 8. 10.

훈구와 사림의 대립과 사화 – 조선 정치사의 피비린내 나는 권력 투쟁

1. 훈구와 사림이란?

조선 전기와 중기에 걸쳐 조정의 정치 세력은 크게 훈구파사림파로 나뉘었습니다.

  • 훈구파 : 조선 건국과 세조의 왕위 찬탈(계유정난)에 공을 세운 공신 세력. 중앙 집권 강화, 권력과 토지를 독점.
  • 사림파 : 성리학적 이상 정치를 추구하는 지방 출신 학자 세력. 향촌 자치와 도덕 정치를 강조.

훈구파는 정치·경제적 실권을 장악했지만, 부정부패가 심했고 이에 사림파가 비판하며 중앙 정계에 진출하게 되었습니다.

기묘사화 당시 조광조가 포승줄에 묶여 압송


2. 사림의 중앙 진출

성종(재위 1469~1494) 때 집현전의 계승 기구인 홍문관이 설치되고, 김종직 등 사림 인물이 등용되었습니다.
사림파는 성리학 이념에 따른 도덕 정치를 주장하며 훈구파의 부패를 공격했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견제는 곧 훈구와 사림 간의 치열한 정치 투쟁으로 번졌고, 그 결과 **사화(士禍)**라는 대규모 숙청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3. 네 차례의 사화

(1) 무오사화 (1498년, 연산군)

배경: 김종직의 제자 김일손이 사초(史草)에 스승의 글 ‘조의제문’을 실음. 이 글은 세조의 왕위 찬탈을 비판하는 내용을 담고 있었고, 훈구파가 이를 문제 삼음.
결과: 김일손 등 사림 인사들이 대거 처형·유배됨.
의의: 사림이 중앙 정치에서 크게 약화된 첫 사건.


(2) 갑자사화 (1504년, 연산군)

배경: 연산군이 생모 윤씨 폐출·사사 사건을 알게 된 후 관련 인물들을 잔혹하게 처벌.
결과: 훈구·사림을 가리지 않고 대규모 숙청, 정치적 혼란 심화.
의의: 연산군 폭정의 절정기, 조선 정치사 최악의 유혈 사태 중 하나.


(3) 기묘사화 (1519년, 중종)

배경: 조광조 등 개혁적 사림이 현량과 설치, 위훈 삭제, 소격서 폐지 등 개혁 추진.
훈구파와 보수적 기득권 세력의 반발로 조광조가 ‘주초위왕(走肖爲王)’ 사건에 연루되어 제거됨.
결과: 조광조 사사, 개혁 중단.
의의: 사림의 이상 정치가 현실 정치와 충돌한 대표 사례.


(4) 을사사화 (1545년, 명종)

배경: 명종 즉위 후 외척 간 권력 다툼. 윤임(대윤)과 윤원형(소윤)의 대립이 격화.
결과: 소윤 세력이 대윤 세력을 숙청.
의의: 사림 내부 분열이 원인이 된 사화로, 외척 정치의 폐해를 보여줌.


4. 사화의 공통 원인

  • 정치 이념 충돌 : 훈구파의 권력 유지 vs 사림파의 성리학적 이상 정치
  • 왕권 강화와 약화의 반복 : 왕이 특정 세력을 견제하기 위해 다른 세력을 이용
  • 외척과 권신의 권력 다툼
  • 사초와 언론 기능 : 사림이 기록과 언론을 통해 훈구 비판 → 탄압으로 이어짐

5. 사화 이후의 변화

네 차례의 사화를 거치면서 사림은 중앙 정계에서 반복적으로 타격을 입었지만, 장기적으로는 향촌 사회에서 학문과 인재를 양성하며 세력을 키웠습니다.
16세기 후반 이후 선조 대에 이르러 사림이 중앙 정치의 주도권을 장악했고, 훈구 세력은 점차 약화되었습니다.
그러나 사림이 정권을 장악한 뒤에도 동인과 서인, 남인과 북인으로 갈라져 당쟁이 심화되었습니다.


6. 역사적 평가

사화는 조선 정치사의 비극적인 권력 투쟁의 연속이었습니다.
훈구와 사림의 대립은 초기에는 부패 견제와 개혁이라는 긍정적 요소도 있었지만, 결국은 피비린내 나는 숙청과 정쟁으로 변질되었습니다.
사림의 중앙 정치 진출 과정은 조선 정치 구조의 변화를 보여주는 중요한 사례로 평가됩니다.


7. 수능·내신 포인트

무오사화(1498) 김종직 ‘조의제문’, 김일손 사사
갑자사화(1504) 연산군의 보복 숙청
기묘사화(1519) 조광조 개혁 실패
을사사화(1545) 대윤·소윤 외척 대립
공통 의의 사림의 약화와 재기, 향촌 기반 강화

8. 함께 보면 좋을 키워드

훈구와 사림, 사화, 무오사화, 갑자사화, 기묘사화, 을사사화, 조광조, 연산군, 명종, 조선 정치사, 성리학 정치


마무리

훈구와 사림의 대립과 네 차례의 사화는 조선 정치사의 흐름을 바꾼 중요한 사건입니다.
권력 다툼과 정치적 숙청은 국가의 안정과 개혁을 가로막았고, 조선 사회에 깊은 상처를 남겼습니다.
그러나 사림이 향촌에서 재기를 준비하며 장기적으로 정치 주도권을 장악한 과정은 역사의 아이러니를 보여줍니다.
오늘날 이 사건을 되짚는 것은 권력 균형과 정치 문화의 중요성을 이해하는 데 큰 교훈을 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