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왕실 무덤 도굴 시도?! '오페르트 도굴 사건'의 전말
1. 오페르트 도굴 사건이란?
1868년(고종 5년), 독일 상인이자 상하이 거주 무역상인 에른스트 오페르트(Ernst Oppert) 가 조선의 남연군(흥선대원군의 아버지) 묘를 도굴하려 했던 충격적인 사건입니다.
조선 정부는 쇄국 정책을 유지하며 외세의 접근을 철저히 차단하고 있었고, 이에 대한 서양 열강의 반발이 커져가던 시기였습니다. 오페르트는 통상을 요구하며, 대원군의 약점을 노리기 위해 그의 부친 묘소를 직접 파헤치는 전례 없는 무례를 저질렀습니다.
이 사건은 조선이 외세와 본격적인 충돌로 이어지는 도화선이 되었고, 한국 근대사에서 외세의 무력 시도가 정치적·문화적 충격으로 이어진 대표적 사건으로 기록됩니다.
2. 사건의 배경 – 통상 요구와 서양 세력의 접근
19세기 중엽, 서양 열강은 조선에 문호 개방을 지속적으로 요구하고 있었습니다. 특히 프랑스, 미국, 독일 등은 무역 거점을 확보하기 위해 조선에 대한 외교적 압박을 시도했지만, 흥선대원군은 이를 단호히 거부했습니다.
✅ 당시 조선의 국정 기조:
- 흥선대원군은 서양 세력의 침입을 막기 위해 ‘척화비’를 세우고, 서양과의 교류를 전면 금지하는 정책을 시행했습니다.
- 이에 서양 세력은 점차 군사적 위협이나 비밀 작전을 통해 조선의 약점을 파고들고자 했습니다.
✅ 오페르트의 계산:
- 오페르트는 통상 요구를 들어주지 않는 흥선대원군을 압박하기 위해, 그의 부친의 무덤을 파헤쳐 유해를 인질 삼거나 협박 수단으로 이용하려는 계획을 세웠습니다.
3. 도굴 시도 – 충남 예산 덕산 남연군 묘에서 벌어진 일
오페르트는 프랑스 선교사 페롱, 미국인 제너럴 셔먼호 관련 인물들과 함께 100여 명 규모의 무장대를 조직해, 충청남도 예산 덕산 지역에 위치한 남연군 묘소를 급습합니다.
✅ 시도 일시: 1868년 5월
✅ 무장 병력과 선박을 동원
✅ 무덤을 파헤치려 했으나, 단단한 석관과 지역 주민들의 저항으로 실패
사건이 실패로 돌아가자, 오페르트 일행은 황급히 철수했습니다. 하지만 이미 이 소식은 전국에 퍼졌고, 조선 민심은 극도로 흥분했으며, 조정은 전례 없는 모욕으로 받아들였습니다.
4. 조선의 대응 – 더 강력한 쇄국, 더 강력한 민족주의
오페르트 도굴 사건은 조선 사회 전체에 큰 충격을 주었습니다.
✅ 흥선대원군의 강경책 강화
- 척화비의 추가 건립
- 외세 접촉 금지령 강화
- 서양 선교사 및 관련 인물에 대한 탄압 강화
✅ 민심의 반응
- 유교적 예에 어긋나는 행위에 분노한 백성들의 민족주의적 감정 고조
- 외세에 대한 불신과 적개심 강화
✅ 국제 사회와의 마찰
- 이 사건은 조선과 서양 열강 간의 신뢰를 급격히 훼손시켰으며, 이후의 신미양요(1871), 병인양요(1866) 등 일련의 충돌로 이어지는 배경이 되었습니다.
5. 오페르트 도굴 사건의 역사적 의미
비록 사건 자체는 ‘실패한 도굴 시도’였지만, 이 사건이 가지는 역사적 의미는 매우 큽니다.
✅ 민족 자존의 상처이자 각성의 계기
무덤을 도굴하려 했다는 것은 조선에게 있어 단순한 범죄를 넘어선 민족적 수치였습니다. 이 사건은 조선의 ‘자주성’에 대한 침해로 여겨졌습니다.
✅ 문화유산 보호에 대한 인식 계기
현대적 개념의 ‘문화재 보호’나 ‘국보’에 대한 개념은 당시엔 희박했지만, 이 사건을 계기로 왕실 무덤 보호의 필요성과 인식이 확산되었습니다.
✅ 서구 열강의 본격적인 압박 시발점
이후 미국의 무력 시도, 일본의 근대화 모델을 따르려는 시도 속에서, 조선은 더욱 고립되고 불안한 상황으로 빠져들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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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무리하며
‘오페르트 도굴 사건’은 단순한 도굴 사건이 아닙니다. 이 사건은 조선이 처한 국제 정세, 쇄국의 한계, 외교적 고립, 그리고 민중의 자존심을 집약한 결정적 사건이었습니다.
그 누구도 왕릉을 침범할 수 없다는 믿음이 무너진 그날, 조선은 자주 외교의 진정한 위기를 마주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 사건은 이후 조선이 자주와 개방 사이에서 얼마나 고통스러운 선택을 해야 했는지를 보여주는 중요한 전환점이 되었습니다.
역사는 과거의 반복이 아닙니다. 그러나 오늘날에도 외교적 주체성과 문화적 자존의 중요성은 여전히 유효합니다. ‘오페르트 도굴 사건’은 그 교훈을 우리에게 강하게 전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