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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알려지지 않은 발해의 전략 – 남경 설치와 3국 외교 균형

by 캐시올로지 2025. 7. 23.

남경 설치와 3국 외교 균형

잘 알려지지 않은 발해의 전략 – 남경 설치와 3국 외교 균형

1. 조선 이전 한국사, 잊혀진 강국 ‘발해’

한국사에서 고대 국가라 하면 대부분은 고구려, 백제, 신라를 떠올립니다. 하지만 이들보다 한 세대 뒤, 고구려 유민들이 세운 발해는 오늘날의 북한, 연해주, 만주, 함경도 지역까지 아우르는 대제국이었습니다.

문제는 발해가 고려에 의해 계승되지 못하고 사라졌다는 점에서, 한국사에서 충분한 주목을 받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발해는 단순한 왕조가 아니라, 외교 전략과 도시 설계까지 고려한 고도화된 국가였습니다.

오늘 소개할 사건은 바로 발해의 남경(南京) 설치와 3국 외교 전략입니다. 이 내용은 교과서에는 거의 등장하지 않지만, 발해의 국제정치 감각을 엿볼 수 있는 결정적 장면입니다.


2. 발해의 수도는 하나가 아니었다?

우리는 보통 수도가 하나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발해는 무려 다섯 개의 수도를 두었습니다.
그 중 가장 주목할 만한 것은 **‘남경(南京, 지금의 함흥 지역 추정)’**입니다.

남경은 발해의 중심 수도인 상경(상경용천부)보다 남쪽에 있었고, 신라와의 국경에 가까운 위치였습니다.
이 남경 설치가 단순한 행정 목적으로만 쓰인 것이 아니라, 발해가 펼친 3국 외교 전략의 일환이었다는 점은 널리 알려져 있지 않습니다.


3. 발해, 신라, 당나라의 3국 외교 구도

8~9세기 동북아는 복잡한 외교 지형 속에 있었습니다.

  • 신라는 당나라와의 오랜 우호 관계를 유지하며 통일 이후 안정을 꾀했고
  • 당나라는 북방의 거란·말갈·토번과의 전쟁 속에 한반도의 정치균형을 유지하려 했습니다
  • 발해는 이런 양강 사이에서 중국식 제도와 문화를 받아들이면서도 독립적 정치 노선을 추구했습니다

발해는 신라와는 적대적 관계, 당나라와는 명목상 사대 외교를 유지하며 균형 전략을 사용했습니다.
그러던 중, 신라가 당나라에 끈질기게 발해 견제를 요청하자, 발해는 이에 대응해 남경을 설치한 것으로 보입니다.


4. 남경 설치의 정치적 의미

남경은 행정적으로도 의미가 있지만, 발해가 신라에 대한 견제 거점을 확보한 외교·군사적 조치였습니다.
즉, 신라가 당을 등에 업고 발해를 압박하려 하자, 발해는 남경을 통해 한반도 동북부 국경 방어를 강화하고, 동시에 신라를 향한 외교적 메시지를 던진 것이죠.

게다가 발해는 이 시기에 당과는 공손한 외교를 유지하면서도 독자적인 연호(예: 대흥, 건흥 등)를 사용하는 이중 외교 전략을 취합니다. 이는 매우 고차원적인 외교 감각이 필요한 정책이었습니다.


5. 남경은 어디였을까?

현재 남경의 위치는 함경남도 함흥 일대 또는 원산 지역으로 추정됩니다. 정확한 유적은 확인되지 않았지만, 다양한 문헌과 지리 기록, 지명의 흔적이 이를 뒷받침합니다.

그렇다면 왜 남경은 우리 역사에서 제대로 다뤄지지 않았을까요?


6. 왜 우리는 이 사건을 잘 모를까?

  1. 고려 중심 서술 – 고려는 발해를 계승하지 않았기 때문에, 역사 서술에서도 발해가 배제되기 쉬웠습니다.
  2. 일제강점기의 역사 왜곡 – 일제는 발해를 ‘중국과 별개로 본 고대 한국사’에서 배제함으로써 민족 정체성을 약화시키려 했습니다.
  3. 남북 분단 – 발해 유적 대부분이 북한과 중국에 있어 직접 연구가 어렵습니다.

이런 이유로 발해의 전략적 행보는 대중적으로 잊혀졌지만, 남경 설치는 발해가 단순히 고구려의 후예가 아닌, 독자적 전략국가였음을 보여주는 중요한 증거입니다.


7. 발해 남경 설치 사건이 주는 교훈

  • 고대 한국도 외교·전략적 사고가 매우 발달해 있었다는 점
  • 단일 수도가 아닌 복수 수도 체제를 도입한 선진 정치 구조
  • 신라와 당나라 사이에서 국익 중심 외교를 펼친 국가 운영 능력

8. 마무리하며

발해는 단순히 고구려의 연장선이 아니라, 자체 문명과 외교 전략을 갖춘 국가였습니다.
남경 설치는 그 상징 중 하나로, 신라-당-발해라는 국제 구도 속에서 살아남기 위한 발해의 정치적 선택이었습니다.

이처럼 교과서에서 짧게만 언급되는 사건 속에도, 우리의 과거는 치열하고 지혜로웠던 역사의 현장을 담고 있습니다.
이제는 발해의 이야기도 우리가 제대로 기억하고 조명해야 할 때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