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종대왕의 숨겨진 업적, 쓰시마 정벌 – 기해동정 이야기
평화의 군주 세종, 왜 전쟁을 선택했는가?
‘세종대왕’ 하면 대부분 사람들은 훈민정음, 과학 기술, 음악과 천문학 등의 문화 업적을 떠올립니다.
하지만 조선 초기를 뒤흔든 왜구의 침입을 막기 위해 세종이 직접 군사 작전을 지휘한 사건이 있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바로 쓰시마 정벌, 혹은 **기해동정(己亥東征, 1419년)**입니다.
이 전쟁은 단순한 국지전이 아니라, 조선의 해양 안보, 대외 외교, 국방 전략이 종합적으로 결합된 군사외교 복합 작전이었습니다.
- 己亥(기해): 60간지 중 36번째 해로, 1419년을 뜻합니다.
- 東征(동정): 동쪽으로 정벌함, 즉 동쪽 방향(일본)에 대한 군사 원정을 의미합니다.
1. 왜구의 끊임없는 침탈, 조선이 대응에 나서다
조선 초, 특히 15세기 초반은 왜구의 약탈과 해적 활동이 극심했던 시기였습니다.
이들은 대부분 일본 규슈·쓰시마 지역을 근거지로 조선의 남해안과 동해안을 습격했습니다.
세종은 즉위 초부터 왜구의 피해를 줄이기 위한 조치를 취했지만, 문제는 쓰시마(對馬島) 자체가 왜구의 본거지 역할을 하고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결국 세종은 정도전의 외교노선과는 다른, 보다 적극적인 군사적 조치를 취하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1419년, 기해년의 ‘기해동정(己亥東征)’**입니다.
2. 기해동정, 조선 수군의 쓰시마 정벌
1419년 6월, 세종은 **이종무(李從茂)**를 수군 도체찰사로 임명하고,
함선 227척, 병력 17,000명을 이끌고 쓰시마 섬을 공격하게 합니다.
이 작전의 주요 목표는 다음과 같았습니다:
- 쓰시마에 숨어 있는 왜구 소탕
- 조선 포로 구출 및 보호
- 해적 기지를 파괴하고 재침 방지
조선군은 쓰시마에 상륙해 수 차례 전투를 벌이며 왜구의 거점 부락을 불태우고 수많은 포로를 구출했습니다.
당시 조선 수군은 명확한 정보 분석과 강력한 해상력, 그리고 정밀한 지형 파악을 바탕으로 상륙전과 섬 점령 작전을 성공적으로 수행했습니다.
3. 결과는 전쟁 이상 – 외교와 해상질서의 재편
기해동정의 직접적인 군사 성과도 컸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결과는 외교적, 정치적 파급력에 있었습니다.
① 왜구 활동의 실질적 약화
조선의 적극적 대응에 쓰시마 왜구 세력은 크게 위축되었고, 조선 연안에서의 약탈이 현저히 줄어듭니다.
② 쓰시마와의 조공관계 수립
이듬해인 1420년, 쓰시마 도주는 조선에 사죄와 조공 외교를 요청하며 무역과 외교 정상화를 타진합니다.
이후 쓰시마는 조선과의 공적 무역 창구 역할을 맡게 되었고, 부산포 개방 및 삼포 무역의 기틀이 마련됩니다.
③ 세종의 해양주권 강화
세종은 이 전쟁을 통해 단순한 군사 승리뿐만 아니라, 국가 주권을 해양까지 확장하는 데 성공한 셈입니다.
4. 왜 우리는 세종의 이 전쟁을 잘 모를까?
- 세종 = 문화적 군주 이미지에 집중된 교육
→ 훈민정음, 과학, 악기 등 인문학 업적만 강조됨 - 대외 전쟁의 부정적 인식
→ 조선의 전쟁은 조공·외교 중심으로 알려져 있음 - 쓰시마 정벌이 일본사 중심 교육에선 불편한 주제
→ 일본 내에서도 이 사건은 축소·은폐된 경향이 있음
하지만 오늘날 시점에서 보면, 기해동정은 한일 외교사, 해양주권, 군사 전략사 측면에서 재조명해야 할 가치가 충분합니다.
5. 현대적 의미 – 평화는 힘에서 비롯된다
세종의 쓰시마 정벌은 단순히 군사력 과시가 아니었습니다.
문무를 겸비한 군주로서, 국익을 위한 강경한 외교 전략의 실천이었습니다.
- “대화로 해결하지 못한 문제는 힘으로라도 지켜야 한다.”
- “해양은 조선의 생명선이며, 침묵은 약탈을 부른다.”
이러한 전략적 결단이 있었기에, 세종 시대는 대외 안정, 내치 강화, 문화 번영이라는 삼각 균형이 가능했던 것입니다.
마무리하며
세종대왕은 단지 위대한 학자 군주가 아니었습니다.
국가의 외교와 안보를 위해 전쟁도 불사한 전략가였습니다.
쓰시마 정벌은 그 상징적인 사건으로, 오늘날 우리에게도 많은 통찰을 줍니다.
“진정한 평화는 단순히 말로 얻어지지 않는다. 준비된 힘만이 평화를 만든다.”
– 세종의 숨겨진 메시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