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카테고리 없음

을사늑약 체결과 국권 피탈 과정 – 1905년 대한제국의 비극

by 캐시올로지 2025. 8. 8.

을사늑약 체결과 국권 피탈 과정 – 1905년 대한제국의 비극

1. 을사늑약이란?

을사늑약(乙巳勒約)은 1905년 11월 17일, 대한제국의 외교권이 일본에 강제로 빼앗긴 조약입니다.
이 조약은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이 대한제국을 식민지로 편입하기 위해 체결한 불평등 조약이었으며, ‘늑약’이라는 말 자체가 강제로 맺은 조약이라는 뜻을 담고 있습니다.
을사늑약 체결 후 일본은 통감부를 설치하여 대한제국의 내정을 사실상 장악했고, 이는 1910년 한일병합조약으로 이어지는 국권 피탈의 출발점이 되었습니다.

을사늑약 체결과 국권 피탈 과정 – 1905년 대한제국의 비극


2. 체결 배경 – 러일전쟁과 열강의 묵인

19세기 말과 20세기 초, 대한제국은 열강의 각축장이었습니다. 청일전쟁(1894~1895) 이후 조선의 종주권이 사라졌고, 러시아와 일본이 조선에 영향력을 행사하려 했습니다.
1904년 발발한 러일전쟁에서 일본이 승리하자, 일본은 조선 지배를 본격적으로 추진했습니다.

특히 일본은 열강과 비밀리에 협정을 맺어 대한제국 지배를 국제적으로 인정받았습니다.

  • 가쓰라-태프트 밀약(1905.7) : 미국은 일본의 조선 지배를, 일본은 미국의 필리핀 지배를 상호 인정
  • 제2차 영일동맹(1905.8) : 영국이 일본의 한반도 지배를 승인
    이러한 외교적 뒷받침 속에서 일본은 외교권 박탈이라는 중대한 조약을 강제로 추진했습니다.

3. 을사늑약 체결 과정

1905년 11월 17일, 일본 특사 이토 히로부미는 무장 병력을 이끌고 경운궁에 들어와 고종 황제와 대신들을 협박했습니다.
회의에 참석한 대신 8명 중 5명이 일본의 압박에 굴복해 찬성표를 던졌습니다. 그러나 황제의 재가도 없었고, 국새(옥새)도 찍히지 않은 상태에서 체결된 불법 문서였습니다.

역사 속에서 이 5명의 대신은 ‘을사오적’이라 불립니다.

  • 이완용(외부대신)
  • 박제순(법부대신)
  • 이지용(내부대신)
  • 이근택(군부대신)
  • 권중현(농상공부대신)

4. 조약의 주요 내용

을사늑약의 핵심 조항은 다음과 같습니다.

  1.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일본에 완전히 위임
  2. 일본이 서울에 통감부를 설치하여 조선을 대표
  3. 대한제국의 외교 사절권 소멸

이 조항으로 대한제국은 더 이상 독립국가로서 외교 활동을 할 수 없게 되었고, 국제사회에서의 지위가 사실상 소멸되었습니다.


5. 국내외 저항

을사늑약 소식은 전국적인 저항을 불러왔습니다.

  • 언론의 반발 : 황성신문의 장지연은 ‘시일야방성대곡’이라는 사설로 민족의 울분을 토로했습니다.
  • 민중 운동 : 상인들은 철시(가게 문 닫기), 학생들은 동맹휴학으로 항의했습니다.
  • 의병 봉기 : 최익현, 민종식, 신돌석 등이 무장 봉기를 일으켰습니다.
  • 외교 투쟁 : 고종은 1907년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열린 제2차 만국평화회의에 이준, 이상설, 이위종을 특사로 파견해 을사늑약의 부당성을 호소했습니다. 하지만 일본의 방해와 열강의 무관심 속에 실패로 끝났습니다.

6. 통감부 설치와 일본의 내정 장악

을사늑약 직후 설치된 통감부는 대한제국의 내정을 장악한 식민 통치 기관이었습니다.
초대 통감 이토 히로부미는 내정·재정·외교 전반을 장악했고, 이후 일본은 군대 해산, 사법권 장악 등 완전한 병합을 준비했습니다.


7. 국권 피탈로 가는 길

을사늑약 이후 대한제국은 점점 더 일본의 손아귀에 들어갔습니다.

  • 1907년 정미7조약 : 군대 해산, 통감 권한 강화
  • 1909년 : 사법권과 경찰권마저 일본이 장악
  • 1910년 8월 29일 : 한일병합조약 체결, 대한제국 완전 멸망

을사늑약은 단순한 외교 조약이 아니라, 국권을 빼앗는 첫 관문이었습니다.


8. 역사적 평가와 의미

오늘날 을사늑약은 국제법적으로 무효입니다.
황제의 재가와 국새가 없었고, 무력과 협박 속에서 강제로 체결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당시 열강은 일본의 한반도 지배를 묵인했고, 대한제국은 외교적으로 고립되어 있었습니다.

을사늑약은 국권 상실의 결정적 계기였으며, 한국 근현대사에서 절대 빼놓을 수 없는 사건입니다.
또한 오늘날까지 매국행위의 대표적 사례로, ‘을사오적’이라는 단어는 민족을 배신한 자를 상징하게 되었습니다.


9. 수능·내신 포인트 정리

  • 연도 : 1905년
  • 관련 전쟁 : 러일전쟁(1904~1905)
  • 외교적 배경 : 가쓰라-태프트 밀약, 제2차 영일동맹
  • 인물 : 이토 히로부미, 이완용, 장지연, 헤이그 특사단
  • 결과 : 외교권 박탈 → 통감부 설치 → 한일병합조약(1910)

10. SEO 최적화 키워드

을사늑약, 을사조약, 을사오적, 1905년 사건, 대한제국 외교권, 러일전쟁과 조선, 헤이그 특사, 통감부 설치, 국권 피탈 과정, 한일병합조약 전개

 

마무리

을사늑약은 한국 근현대사의 비극적 전환점입니다.
1905년 11월의 그날, 외교권을 빼앗긴 순간부터 대한제국은 식민지의 길로 들어섰습니다.
이 사건을 정확히 이해하는 것은 단순한 시험 대비를 넘어, 나라를 잃는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깊이 생각하게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