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의 목숨을 노린 그림자 – 고종 암살 미수 사건, 이강년의 의거
고종 암살 미수 사건이란?
1908년, 일제강점기 직전의 혼란한 조선 말기. 이 시기에는 독립운동 초기의 거사와 암살 시도가 전국적으로 분출되던 때였다. 그중에서도 1908년 3월, 독립운동가 이강년 장군이 고종 황제 암살을 기도한 사건은 한국사에서 거의 다뤄지지 않는 충격적인 역사다.
당시 일본의 강압으로 퇴위당한 고종은 한일병합의 구실로 이용될 수 있는 상징적 존재였다. 이강년은 고종을 ‘일제에 협조한 국권 침탈의 중심 인물’로 규정하고, 조선을 다시 살리기 위해 고종을 제거하려 했다. 이 사건은 단순한 테러가 아닌, 독립운동과 민족자주권을 위한 비극적인 선택이자 절규였다.
시대 배경 – 왜 이런 시도가 벌어졌는가?
1905년 을사늑약 체결 후, 조선은 사실상 외교권을 상실한 상태였고, 통감부는 내정을 장악하며 일제의 영향력을 확대하고 있었다. 1907년에는 고종이 헤이그 밀사 사건으로 퇴위당하고, 순종이 즉위했다. 하지만 백성들은 여전히 고종을 ‘진정한 황제’로 인식하고 있었고, 일제는 이를 경계했다.
반면, 일부 의병 지도자들은 고종이 일본의 압박에 순응하고, 독립운동에 비협조적이라고 판단했다. 그 대표 인물이 바로 **이강년(李康年)**이다. 그는 충청도와 강원도 일대에서 수천 명의 의병을 조직한 중부지역 최대 의병장 중 하나였고, 1908년 2월경 ‘고종 제거’라는 과감한 계획을 실행에 옮긴다.
사건 전개 – 고종을 제거하라
이강년은 서울로 잠입한 후, 고종의 동선과 경호 상황을 치밀하게 파악한다. 당시 덕수궁 안에서 조용히 거처하던 고종은 겉보기엔 권한이 없는 퇴위 군주였지만, 백성들의 지지는 여전했고, 일본은 그를 제거하지는 못한 상태였다.
이강년은 권총과 독극물, 그리고 2명의 동지를 데리고 왕궁에 잠입하려 했으나, 궁 내부 정보 유출로 인해 사전에 적발된다. 이들은 왕궁 근처에서 체포되고, 이강년은 곧바로 통감부로 인계된다. 그는 체포 당시 “나는 나라를 되찾기 위해 군주를 죽이려 한 것”이라며 자신의 신념을 굽히지 않았다.
결과와 파장 – 역사에서 지워진 이야기
이강년은 곧바로 군법회의에 회부되어 사형이 선고되었고, 이듬해 순국한다. 하지만 이 사건은 통감부와 조선 정부 모두 철저히 은폐했다. 이유는 명백하다. 고종을 암살하려 한 인물이 민중에게 존경받던 의병장이었다는 사실이 대중에게 알려진다면, 고종의 정통성과 일제의 통치 기반이 크게 흔들릴 수 있었기 때문이다.
당시 신문에서도 간단한 ‘불온자 처단’ 정도로 처리되었으며, 이강년의 의도나 정체는 철저히 왜곡되거나 생략되었다. 이후 역사 교과서나 언론에서도 해당 사건은 거의 다뤄지지 않으며, 그의 의거는 오랜 세월 잊혀진 그림자 속에 머물게 되었다.
왜 이 사건은 중요한가?
고종 암살 미수 사건은 단순한 의병 항쟁이 아니다. 이는 ‘왕정 체제’에 대한 도전이자, 조선이라는 국가 체제 자체에 대한 절망과 각성이 뒤섞인 의거였다. 이강년은 조선의 독립을 위해선 일본뿐 아니라 내부 권력 구조도 개혁되어야 한다는 급진적 사상을 실현하려 한 것이다.
이처럼 조선 후기에는 단순히 외세와의 투쟁뿐만 아니라 내부 개혁, 군주제에 대한 반발, 그리고 새로운 민족 국가에 대한 열망이 점차 피어나고 있었다. 이는 훗날 1919년 3.1운동, 1920년대 사회주의 운동으로 이어지는 사상적 토대 중 하나가 된다.
왜 잘 알려지지 않았을까?
- 왕 암살 시도라는 민감한 주제
- 고종에 대한 대중적 인식과 충돌
- 의병 영웅의 이중적 평가
- 일제 및 조선 귀족층의 철저한 은폐
이 사건은 민족주의 관점에서도, 왕권 중심 관점에서도 다루기 민감한 내용이었기에 양쪽 모두에서 묻혔다.
결론 – 이강년, 의병장이자 개혁가
이강년은 단순한 무장 독립운동가가 아니라, 조선 후기 급변하는 시대 속에서 내부 문제를 직시한 개혁가였다. 고종을 향한 암살 시도는 충격적인 선택이었지만, 그 이면에는 ‘누가 진정으로 나라를 위한가’에 대한 깊은 고민이 담겨 있었다.
한국사는 단지 영웅들의 승리나 외세와의 전쟁만으로 구성되어 있지 않다. 내부의 고뇌, 선택의 갈림길에서 발생한 다양한 목소리 또한 반드시 기억되어야 한다. 이강년의 의거는 오늘날에도 국가와 권력, 민중과 정의를 다시 돌아보게 만드는 중요한 역사적 물음표다.